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체제가 한창이던 60년대 초반, 미군은 적의 핵미사일 공격을 받았을 때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컴퓨터들과 미사일 기지 간의 상호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 컴퓨터 통신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방성은 곧 이러한 관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였다. 처음 이 연구를 주도한 랜드의 폴 배런은 패킷 스위칭 기술을 활용한 분산 소통망을 제안하였다. 그의 생각은 컴퓨터들 사이에 교환되는 데이터들을 패킷이라는 더 작은 조각들로 나눈 후 이 패킷들을 전화선을 통해 송출하는 방식이었다. 각각의 패킷에는 정보의 출발점, 종착지점, 그리고 원 자료상의 위치를 알리는 개별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만약 패킷이 대상 컴퓨터까지 도착하는 데 실패할 경우 다른 전화선을 통해 보내도록 하였다. 1966년 미 국방성 기술연구소는 17개의 컴퓨터 설비들을 미국 전역에 보유하고 있었다.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연구실에서 이 컴퓨터 자원들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고등기술연구소는 장거리 전화망을 유지해야 했고, 일부 연구자들이 이 전화망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들 중 밥 테일러는 하나의 터미널로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다른 컴퓨터들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고민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아르파는 배런의 패킷 스위칭 기술에 기초한 컴퓨터 네트워크의 확립과 관련된 과제를 지원하였다. 볼트, 베라넥, 노이만이라는 회사가 이 과제를 담당하면서 자료를 패킷으로 분할하고, 이를 다시 결합하는 기술 개발을 맡았는데, 이와 함께 컴퓨터들을 연결할 수 있는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를 바탕으로 컴퓨터 상호 간의 패킷 교환이 시작되었고, 아르파넷이란 네트워크가 탄생했다. 1970년대 초반 아르파넷에 연결된 컴퓨터는 매년 두 배로 증가해서 1972년에는 37개에 이르렀다. 이 네트워크는 다른 컴퓨터에의 원거리 접속, 파일전송을 통한 정보공유, 그리고 다른 컴퓨터 주변기기들의 원거리 공유라는 세 가지 주요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1972년에는 처음으로 전자우편이 시작되었고, 그 해에 아르파넷은 컴퓨터 통신에 대한 국제 학술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성공적인 공개와 더불어 네트워크의 잠재력이 인정되면서 아르파넷에는 20일마다 1대의 컴퓨터가 연결되었다. 1975년 네트워크에서의 군사 관련 정보 수요가 증가하면서 아르파넷의 관리는 국방성의 국방 커뮤니케이션 부로 이관되었고, 대학과 정부 기관들에 대해서는 국방부 지침에 따른 제한적 접근이 허용되었다. 네트워크에의 접근제한은 이에 접근이 허용되지 않은 여타 기관들이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다양한 네트워크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AT&T의 UUCP,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USENET, 대학 연구자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유명한 CSNET, IBM의 BITNET 등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대학과 연구소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네트워크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정보를 공유하고,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토론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80년대 초반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각 지역에서는 네트워크들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네트워크들은 상이한 통신규약들로 인해 상호 간의 통신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83년 1월 아르파넷은 TCP/IP라는 70년대 중반에 개발된 규약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의 표준화를 지원하였다. 이 규약은 상이한 네트워크들을 연결할 수 있는 특징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네트워크가 이 규약을 사용하여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은 원래 이 규약의 이름이었으나 이제는 이러한 네트워크들의 집합체로 알려지게 되었다. 1987년 BITNET과 CSNETㅣ CREN으로 인터넷에 연결되면서 인터넷은 명실공히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로 성장하여, 80년대 후반에 이르면 50,000개 이상의 접속 지점들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었다. 아르파넷은 21년간의 서비스를 끝으로 1990년 1월 1일 해체되었다. 이 무렵 보통 사람들도 가정에서 컴퓨터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모뎀을 사용하여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을 통해 인터넷에 연결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초반, 정보 제공자들은 인터넷의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며, 여기에 주소를 부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1992년 제네바에서는 인터넷에서 더욱 더 효율적인 정보의 조직화 및 접근을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해 하이퍼텍스트 개념에 기초한 시스템이 제안되었다. 이 시스템을 개발한 팀 버너스-리는 이를 월드와이드웹이라 불렀다. 1993년 당시 일리노이 대학과 국립 슈퍼컴퓨팅 응용연구소에 근무하던 마크 안데르센은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을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이들은 모자익 이라는 윈도용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서, 그림, 영상, 소리 등을 하나의 문서에 담은 자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모자익은 파일의 전송뿐 아니라 전자메일도 가능케 하였으며, USENET 토론에의 참여, 문서자료의 접근 등 과거에 상이한 프로그램들로 가능했던 작업을 통합시켰다. 모자익과 월드와이드웹은 수많은 컴퓨터 사용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적 네트워크에 쉽게 접근하도록 사였다. 오늘날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나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이들을 더욱 개선, 발전시킨 것이다. 오늘날의 인터넷이 거의 모든 컴퓨터를 급속한 속도로 연결하는 데에는 불과 3~4년 정도면 충분하였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기술들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는 누구도 확실히 예측할 수 없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기술의 발전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어떠한 규약에 의해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 있다. 처음 인터넷의 원칙과 정신을 만들어온 사람들은 소수의 전문가였다.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과 조직들이 이에 가세하였고, 그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변화하였다. 이 공간에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걸고 있는 상이한 세력들 간의 관계, 그들 간의 게임의 규칙, 그리고 이것을 지배하는 정신을 둘러싼 투쟁이 인터넷의 미래를 규정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의 기술 혁명을 주도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만약 인터넷이 삐그덕거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기술, 전망, 동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함께 미래를 개척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