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서로 만나 집단을 이루고 그 안에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최근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컴퓨터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만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컴퓨터 통신의 대화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토론방에서 열변을 토하며,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동호회를 만들고, 지역의 시민운동을 위해 주민 회의를 열기도 하며, 학술적 교류를 위한 학술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만남은 점점 일반화되어 가고 있으며,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컴퓨터 네트워크가 만남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은 컴퓨터를 매개로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라디오나 TV와 같이 한 방향으로 전달되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 또한 대화자들 사이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편지처럼 시간을 두고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컴퓨터 네트워크는 사람과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과 정보를 직접 연결해 주고, 한 사람과 한 사람뿐만 아니라, 한 사람과 여러 사람 사이, 여러 사람과 여러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관계를 맺어 왔다. 생각해 보면 일생을 통해 거리, 카페, 술집, 해변, 산 등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란 거의 없다. 그러나 컴퓨터 네트워크를 사용하면 사회적 네트워크로 연결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컴퓨터통신의 대화방에서, 토론방에서, 게시판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더러는 오랫동안 만남의 관계를 유지하며, 때로는 실제로 만나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간혹 영화 접속처럼 서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이 결합한 컴퓨터 네트워크는 이제껏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만남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 컴퓨터 네트워크를 단지 많은 컴퓨터와 그것들을 연결하는 유리섬유에 의해 이루어진 거대한 연락망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들의 만남을 위해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이다. 우리는 이러한 공간을 정보공간이라고 부른다. 정보공간은 물리적으로 컴퓨터와 컴퓨터 네트워크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컴퓨터와 컴퓨터 네트워크 자체를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보공간의 공간적 이미지는 이의 물리적 기반인 컴퓨터 네트워크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보공간을 볼 수 없다. 단지 이 공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4차원의 공간이 수학적으로는 존재하지만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정보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허구의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다. 정보공간에는 일상적인 공간의 중요한 요소인 거리에 대한 개념이 없다. 따라서 정보공간의 실체에 대한 혼란은 거리 감각의 혼란에서 비롯된다. 수학적 도형 중 우리가 늘 사용하는 거리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도형은 정보공간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혼란과 비슷한 형태의 혼란을 일으키며 동시에 수학적 확실성을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러한 도형을 보면 우리는 마치 상상의 세계를 접하는 것 같은 신비스러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수학적 상상의 세계의 기묘함과 예술적 정교함을 함께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상적 공간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공간 배열로 인해 허구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정보공간 자체의 위치도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이다. 정보공간에서 우리는 사용자 이름을 갖는다. 이것은 이름인 동시에 주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상적 공간과 달리 정보공간에서는 주소가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반면에 어느 곳에서든 같은 컴퓨터에 접속하기만 하면 항상 똑같은 이름과 주소를 갖는다. 즉 정보공간은 어떤 특정한 곳에도 있지 않으며, 동시에 어느 곳에나 항상 있다. 정보공간의 공간적 인식이 혼란스러워지는 또 다른 이유는 가상현실 기술에 의한 공간적 이미지의 구현 때문이다. 공상과학영화 "토털 리콜"에서 보여지듯이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의 세계와 실제의 세계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아직은 우리의 정보기술이 가상현실을 실제 현실처럼 완벽하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는 다소 추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발전 속도를 보면 그다지 머지않은 미래에 실제 현실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상현실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제인 것과 아닌 것에 대한 판단도 매우 다양해질 것이다. 현재 가상현실의 혼란을 경험하기는 어렵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을 통해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의 혼란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실제 현실이 사진, 영상, 글, 그림 등을 통해 전달될 때 이러한 현실은 실제와 똑같지 않은 매개된 현실이며, 상징적으로 표현된 현실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 현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통해 파악한다. 마치 풍경화를 통해 밖의 풍경을 파악하는 것과 같이 사진, 영상, 그림, 글 등을 통해 매개되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매개된 현실과 직접 경험하는 현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매개된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상현실의 실제성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정보공간의 공간적 이미지가 컴퓨터 기술에 의해 이상적으로 투영된 상상 속의 존재며 주관적인 인식에 의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베네딕트는 정보공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고, 상상한 것을 실제인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정보공간은 순수한 정보의 영역으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정보공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정보공간이 컴퓨터 안에 혹은 화면에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컴퓨터의 스위치를 켜면 공간이 생겼다가, 스위치를 내리면 공간이 사라진다고 본다. 그러나 정보공간은 컴퓨터의 전원을 켜거나 끄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전원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전 세계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컴퓨터를 끄고 다시 켜지 않는 한 정보공간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보공간은 깁슨의 "수많은 사람이 마치 합의한 듯이 경험하는" 사이버스페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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